가족 중 한 사람이 나머지 식구 몫까지 보험을 들어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쁘니까, 챙겨주려고, 그때는 별생각 없이 서류에 대신 이름을 적습니다. 몇 년 동안 보험료가 빠져나가고 증권도 집에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고가 나서 청구할 때 그 서명 하나가 문제가 됩니다.
대법원이 판단한 것
대법원 2024년 11월 14일 선고 2024다238392 판결입니다.
타인의 신체 상해를 보험사고로 하는 이른바 ‘타인의 상해보험계약’을 체결하는 경우에는 보험계약 체결 시에 그 타인의 서면 동의를 얻어야 한다. 나아가 상법 제731조 제1항은 강행법규로서, 보험계약자가 이를 위반하여 타인의 상해보험계약을 체결하면서 보험계약 체결 시에 그 타인의 서면 동의를 얻지 않았다면 그 보험계약은 무효로 보아야 한다.
강행법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당사자끼리 달리 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동의를 나중에 받거나 사후에 추인하는 방법으로 되살릴 수 없습니다.
대법원은 또 하나를 확인했습니다. 계약을 체결한 사람이 스스로 무효를 주장하는 것이 신의성실이나 금반언의 원칙에 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배척하면 법의 취지가 몰각된다고 보았습니다.
배우자가 대신 서명한 사건
배우자가 2009년에 보험계약을 체결하면서 보험청약서의 피보험자 자필서명란에 본인 이름을 적고 서명했습니다. 피보험자는 그 배우자였습니다.
2020년 12월, 피보험자가 집 화장실에서 넘어져 제5·6흉추 폐쇄성 골절 상해를 입었습니다. 이듬해 풍선척추성형술을 받았고, 여섯 달 뒤 제6흉추 압박 정도 62%, 후만각도 36.3도로 측정되어 척추 장해분류표상 「척추에 심한 기형을 남긴 때」에 해당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장해는 분명히 남았습니다. 측정 수치도 기준을 넘었습니다. 약관 장해분류표에서 「척추(등뼈)에 심한 기형을 남긴 때」의 지급률은 **50%**입니다. 척추 항목 중 가장 높은 구간이고, 뚜렷한 기형 30%나 약간의 기형 15%와는 차이가 큽니다.
그런데 계약 자체가 무효여서 보험금을 받지 못했습니다. 장해가 얼마나 무거운지는 따져볼 자리에도 가지 못한 것입니다.
왜 이런 규정이 있나요
상법 제731조 제1항은 다른 사람의 사망을 보험사고로 하는 계약에 그 사람의 서면 동의를 요구합니다. 상해보험에도 준용됩니다.
취지는 세 가지입니다. 도박보험이 되는 것을 막고, 피보험자에게 위해가 가해질 우려를 없애며, 동의 없이 남의 사망이나 상해를 계약 조건으로 삼는 데서 오는 공서양속 침해를 막자는 것입니다.
취지가 이렇다 보니 법원은 예외를 좁게 봅니다. 오래 보험료를 냈다거나 계약자가 가족이라는 사정만으로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본인이 계약자이면서 피보험자인 계약은 이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계약자와 피보험자가 다른 계약입니다. 부모가 성인 자녀를, 배우자가 배우자를, 형제가 형제를 피보험자로 들어 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 확인 항목 | 대신 서명한 상태 | 본인이 서명한 상태 |
|---|---|---|
| 계약의 효력 | 무효가 될 수 있음 | 유효 |
| 장해가 남았을 때 | 측정 수치와 무관하게 지급 불가 | 장해분류표에 따라 산정 |
| 되살릴 방법 | 사후 동의로 치유되지 않음 | 해당 없음 |
사고가 나기 전에 확인하는 일입니다
이 문제는 손해사정으로 되돌릴 수 있는 종류가 아닙니다. 사고가 난 뒤에 서명이 문제되면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사고 전에 확인해 두시라고 말씀드립니다.
서면 동의가 필요한 계약인지부터 가려야 합니다. 계약자와 피보험자가 같으면 해당이 없고, 다르면 확인 대상입니다. 증권에 계약자와 피보험자가 각각 적혀 있으니 그것부터 보시면 됩니다.
확인하실 것은 하나입니다. 보험청약서의 피보험자 자필서명란입니다. 본인이 직접 서명한 것이 맞는지 보시면 됩니다. 증권만으로는 알 수 없고 청약서를 봐야 합니다.
본인이 서명한 것이 아니라면 보험사에 문의해 정리 방법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계약을 다시 체결하는 것이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미 사고가 난 뒤라면, 청약서와 계약 경위를 먼저 확인합니다. 사안에 따라 다투어 볼 여지가 있는지는 청약서의 기재와 계약 당시 사정에 달려 있고, 이 국면은 변호사와 함께 검토가 필요한 영역입니다.
대신 서명한 줄도 몰랐던 경우
상담에서 만나는 유형입니다. 가족이 들어준 보험이라는 것은 알지만 서명을 누가 했는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경우입니다. 청약서를 찾아보면 필체가 본인 것이 아닌 것이 확인되기도 합니다.
여러 식구 보험을 한 사람이 한꺼번에 정리해 든 경우에는 같은 문제가 여러 건에 걸쳐 있을 수 있습니다. 한 건에서 문제가 드러나면 나머지도 함께 확인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사고가 난 뒤에야 청약서를 처음 꺼내 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때는 이미 바로잡기 어렵습니다.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특정 사례가 아니라,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유형으로 설명드렸습니다.)
지금 확인해보실 것들
- 내 보험을 가족이 대신 들어주었다
- 보험청약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 청약서의 피보험자 자필서명란을 누가 썼는지 모른다
- 여러 식구 보험을 한 사람이 한꺼번에 가입했다
- 사고 후 청구했는데 계약 효력을 문제 삼는 안내를 받았다
해당되는 사유가 있다면 사고가 나기 전에 청약서부터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치며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지는 사고가 난 뒤에 정해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계약할 때 누가 서명했는가에서 이미 정해집니다. 청약서를 한 번 꺼내 보는 데 드는 시간은 몇 분이지만, 확인하지 않고 지나가면 그 결과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장해가 남고 측정 수치가 기준을 넘어도, 계약이 무효면 그 뒤가 없습니다.
다치신 분에게 필요한 일은 저희가 빠짐없이 챙깁니다. 진단서와 의무기록, 보험사 산정 내역을 약관 기준과 대조하는 일도, 부족한 자료가 무엇인지 안내하는 일도, 유리한 판례와 분쟁조정사례를 근거로 제시하는 일도, 제3병원 자문과 법률자문이 필요한지 검토하는 일도 끝까지 처리합니다. 저희 손이 닿지 않는 곳은 단 하나, 보험사가 끝내 지급을 거부하는 순간뿐입니다. 그 마지막 벽 앞까지 저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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